도끼 – Still On My Way (ft. 자이언티)

오직 열정과 패기
im still on my way tho
어제와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처음인 것처럼
늘 철없던 때의 기분 
그대로 이 길을 걸어
어렸을 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조용히 움츠린 채로 
살 수 밖에 없어서
배가 고파도 먹을게 
냉수밖에 없어서
눈에 보이는 대로 
훔칠 수 밖에 없었던
나를 용서하소서 
아직도 기억해 그 날을
창 밖을 보며 한숨만 
내쉬던 어린 나를
위로해주던 사람 하나 
없었지 내 곁엔
덕분에 이젠 어떤 일을 
겪어도 its nothin
몸집은 작게 컸지만 
i’m big hearted
Them Peeps doubted about 
my dreams but 
i still got it real artist 
we dont compromise 
타협 하나 없이
니 머리 위에 내 이름 
딱 두 글자를 적지
이제 적지 않은 돈 
명예 많은 걸 얻었어도
몇 십에 목숨 걸다 
몇 십억을 벌었어도
난 아직 여전해
음악 그리고 꿈만이 내 터전에
무대 위가 가장 행복한 뮤지션
High minded ambition
Mr. Independent still 
be makin my own decisions
사람들은 내가 돈 
벌더니 변했다며 털어
절대 난 더 자유롭게 
음악 하기 위해 벌어
 
I’m still on my way 
여전히 여기 이 자리
내 가족 내 친구 우리 동네 이 거리
Im still on my way
난 바뀐 게 없지 
거의 없지 내 차키 
좋은 옷 좋은 여자들 빼곤
I’m still on my way on my way
on my way on my way
I’m still on my way on my way
on my way on my way
 
어차피 꿈이란 건 
아무도 믿어주지도
않아 나 대신 누가 
날 위해 이뤄주지도
않는 동시에 나의 
성공을 빌어주지도
않을 뿐더러 나의
희망을 키워주긴 커녕
나의 실패만 바라는 
놈들 뿐인 이곳
여기저기 의심이 
가득한 눈들이 보여
난 그 눈을 피해 숨지
않아 니들 눈 앞에
내 성공이 더 잘 보이게 
한길만 팠네
 
Wattup partner how 
u like me now bruh
이젠 먼 나라에서 
한국으로 오네 날 보러
감히 누가 날 더러 
망할 수 있다 말하겠어
난 죽기 전엔 망할 
일이 없지 
yeah I guess so
난 계속해서 꿈을 
이뤄 가는 중인데
주변 사람들은 꿈을 
잃어 가는 중이네
나이를 먹었단 핑계로 
또 현실을 핑계로
풀이 꺾인 채로 
죽지 못해 사는 듯 지내고
언제부터 힙합이 
힙합인걸 티 내고
대표하는 게 부끄러운 
짓이 됐는지 이대로
니가 배신한 꿈 
피하고 비켜갈 때
난 첫날부터 등뒤에서 
혼자 지켜왔네
차 사고 자랑하는 
날 욕하고 시기하기 전에
누가 더 행복하고 
잘사는지를 봐
이제 와서 힙합인 
척하는 애들에게 전해
Im outchea and 
im livin my illionaire life

송곳

쓸데없는 어른 흉내내지말고, 네 밥그릇이나 해.

일을 어렵게 만드네

내가 나를 경멸하지 않고도 세상과 결합 할 수 있다는 희망

차라리 칼이었으면 좋겠다. 공포나 통증은 순간을 넘기면 사라진다. 칼 다음에 오는 것들. 납득되지 않는 이 상황을 부모님은 애써 이해하는척 해야할 것이고. 어쩌면 평생동안 이어질지 모르는 그들의 한숨과 미련, 자책을 나는 못 본 척 해야 할 것이다. 안정된 궤도를 벗어나 다시 행선지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출발선에 서야하고, 이젠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무언가를 포기하며 일 분간 남자였던 대가로 견뎌야 할  지루하고 소모적이고 불확실한 아주많은 시간들. 자부심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칼 다음에 내가 무엇을 잃게 될지 알려준 적이 없다.

-1화

링에 처음 올라가면 아무것도 못해요. 그냥 가드 꽉 잠그고 대가리 딱 숙이고 도망만 다녀요. 말은 쉬운데 그게 자존심 무지상합니다. 초짜가 맞는건 당연한 기고, 그거보고 비웃는 사람 하나 없는데 괜히 혼자 욱하게 되는거죠. 그러다가 기어이 하면 안되는 짓을 저질러요. 잽 한 방. 그 잽의 의미가 뭐냐. 나한테도 주먹이 있다. 아이고, 내한테도 주먹이 없다는 거 누가 모릅니까. 니도 알고 네도 알지. 세상 사람 다 아는 그 사실을 보여줘봤자 득될거 하나 없는걸 굳이 보여주는거야. 그 한 방 때문에. 안 맞아도 될 것 까지도 죽도록 맞는거죠. 그러고나면 다음날 또 안 올라갈거 같죠? 또 올라가. 왜 그런지 압니까? 잘라고 눈을 감으면 자기가 맞았던 주먹이 막 보이면서 억울하고, 쪽팔리고 기분 더러운데, 어느 순간부터 희한하게 자기가 때렸던 그 한 방 그것만 자꾸 생각해.  슬쩍 닫기만했던 주먹이 마치 대단한 일격처럼 부풀려지고, 그러다보면 내가 이기지 못해도 완전히 진것도 아니고 . 그런 착각이 드는거죠. 그럼 다음날 또 올라가 또 터지는거죠.

지겹다. 강제된 선택지에 시시한 통찰을 더해 마치 새로운 답인냥 떠들어대는 어른인척 하는 어른들의 하나만 아는 조언들. 그리고 언제나 그 하나만을 아는 조언들이 정답인 현실

-2화

●저희회사는 프랑스 회사고
점장도 프랑스인인데
왜 노조를 거부하는 걸까요?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여기서는 법을 어겨도 처벌 안받고
욕 하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이득을 보는데
어느 성인군자가 안지켜도 될 법 지켜가면서 손해보겠어

사람들은 대부분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되는거요.
●신날거야. 응원하는 야구팀이 이긴것 같고 그렇지?
당신한테는 이게 생활이 아니니깐 그리고 당신 삶도 아니니까
내가 이수인씨 좋은 사람인거 안다고했지? 좋은 사람인데
당신 지금 나쁜 사람 되기 싫어서 이러는거 아니야?
만약 해고지시 이수인씨한테 안떨어졌으면 어떻게 했을것 같아?
모르는척했겠지. 아니야?
지 몸에 똥안묻히고 변소 못치워
싸움이라는게 고고하게만 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앞으로 이겨도 지는 날의 연속이야
이겨도 서럽고 막막해
그런데 당신 생활도, 삶도 아닌 당신이 이 일을 하겠다고?

이 싸움 진다고, 당신 잃을게 없다고.
이거 당신 싸움 아니라고.
당신 자존심 지키자고 푸르미 밥줄 끊을 생각 없어.

●악취나 나는 썩은 물은 반모금쯤 삼키고 속옷까지 흥건히 젖고나면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마른 흑먼지를 씹으며, 거친 바닥을 기는 일이나
이곳저것 찔리고 긁기는 거쯤은 더이상 대수롭지 않게 만드는 해방감

-3화

연인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떠오른 몇 가지 생각중 하나

‘이제 더 이상 가슴으로 사랑 할 수 없겠구나..’

성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으로 닥쳐올 일을 준비하고 다가오는 일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것을 ‘나이값’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되는 연애와 헤어짐 속에 우리는 점차 자신만의 기준이 우뚝 솟게 되나보다.

대학시절 아무 조건없이 만났던 인연들은 그저 좋았다. 때론 여자친구가 묻곤했다. “내가 왜 좋아?” 그럼 나는  말한다. “그냥, 너라서. 그리고 네 앞에서는 나다운 모습이 나와.” 그러나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둘 다 미래를 얘기할 만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거니와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어렵다. 사람은 그 사람 자체로 존중받아야하며, 어떤 계산 이전에, 이 사람과 평생을 살 수 있는 정신적 교감이 느껴지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인가. 그런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려운데, 무엇을 더 바라는 것일까.

이미 너무나 속물이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 결정을 내린 것일까.

연인을 선택하는 기준이 갑자기 흐려졌다.

여성스럽고, 자기 할 일 잘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랑을 주고 받을 줄 아는 현명하고 이쁜여자! 를 이상형으로 부르짖었지만

이 말에는 이율배반적인 말을 내포했기 때문에 나의 가치관이 흔들린 것인가.

나를 조금 더 갈고닦자. 그리고 기다리자.

스파이 브릿지

스파이를 변호하게 된 제임스 도노반은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밝혔다.

‘당신과 나를 같은 미국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단 하나요. ‘규정’. 달리 말하면 ‘헌법’ 우리는 법을 지키기에 미국인인 것이오’

헌법 하에 모든 국민이 평등해 질 수 있다. 또한 안으로는 미국인으로서 대우를 받고, 밖으로는 미국인으로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평등과 보호가 미국을 단단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제임스 도노반은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을 변호하게 된다.

루돌프 아벨은 단 한 번도 국가를 버린 적이 없는  굳은 심지의 애국자다.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 국가의 주요한 기밀을 유출 할 수도 있는 상황 속에,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리도 초연하고 담담하게 다가오는 죽음과 알 수 없는 미래를 받아들이게 했을까? 당시 소련과 미국의 치열한 힘 싸움은 사소한 실수 하나에 전 인류가 멸망 할 수 있을만큼 극박한 상황에 치닫고 있었다. ‘핵무기’라는 협상 카드를 들고 교란과 스파이전이 치열했던 당시, 국민들은 강요당한 애국심을 지니며 살아갔다. 뛰어난 국민은 국가를 위해 언제든 ‘자폭장치’를 누를 준비가 되어있어야하며, 그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벨의 자발적 애국심을 감탄하기 이전에, 시대적 상황과 국가가 만들어놓은 프레임 속에 다수의 개인이 희생당한 끔찍한 전쟁터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욱 커진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평화를 위해’ 라는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그것을 알기에 도노반은 원리원칙이 무시된 채 아벨을 유죄로 몰고가려는 재판부와 다수의 국민들을 향해 브레이크 걸지 않았을까? 무엇을 위해 행동해야 하며,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판단 한 뒤에 다수의 합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고 이행하는 것이 미국이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떳떳한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아벨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도노반은 아벨에게 인간적인 감정과 존경심을 느끼게 된다. 아벨은 미국내에선 스파이이지만, 소련에서는 진정한 영웅이자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과 국가를 떠나 인간 자체를 봤을때 너무나 매력적인 아벨은 결국 도노반의 도움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마지막 포로교환 장면에서 아벨은 도노반의 협상을 기다려주고 초상화 한 점을 선물하게 된다.

2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도노반의 굳은 심지, 미국에 대한 애국심, 아벨과 대조됐던 많은 인물과 그에 더욱 부각됐던 아벨의 인물상, 아벨과 도노반이 나눴던 인간애까지.  곱씹을수록 더욱 많은 의미가 나에게 다가와 조금이나마 정리해본다.

인연

옷 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어렸을 적 부터 들었다. 물론 다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굉장히 냉철하며 인간관계를 비즈니스로 대하는 친구와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비즈니스적으로 호기심이 생기는 사람에게는 적극적이지만,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럴 마음도 안들어가니와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므로 인사를 할 때도 가볍게 묵념을 할 뿐 자신이 먼저 다가갈 생각을 안한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나 동의하지만, 그 친구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넓혀주고 싶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옷 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네 앞이 지나가는 사람 조차 인연이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신기한 인연이다. 빛이 1년동안 이동하는 거리를 광년이라고 한다. 수 백억 광년을 달려도 도달하지 못하는 광활한 우주 속에 지구가 있고, 드넓은 지구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 속에 지금 이 순간 내 앞을 지나는 사람이 있다. 무수히 낮은 확률 속에 나와 옷 깃이 스치는 사람, 나아가 인사를 하며 지내는 지인들, 마음 깊이 나누는 관계는 정말로 소중한 인연인 것이다. 생각이 이렇게 뻗어나간다면, 사람을 바라볼 때 무엇을 바라고 만나기 이전에 그저 이 사람과 나와의 만남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진심을 다해 사람을 대해야 할 필요성이 조금은 생기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적인 면에서 우린 너무나 많이 재고 따진다. 사실 끼리끼리 만나는게 편한 것도 맞다. 관심분야가 다르면 이야기에 흥미를 잃게되고, 가치관이 다르다면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꽤나 시간이 오래걸리기 때문에, 우린 비슷한 사람들끼리 그룹을 지어 다니는 것 같다. 학생시절 생각없이 만났던 친구들을 10년이 지나 다시 만나보면 너무나 달라진 삶 속에 공통분모를 잃고 그저 따가운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친구 너무 변했어’ 라는 말과 함께 그때 그 시절은 추억으로 남고 현재의 변한 모습에 씁쓸함이 자리잡게 된다. 관심 분모를 찾기위해 학연,지연, 혈연을 물어보는 것은 소속감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당연한 모습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기준을 보다 넓고 관대하게 잡는다면 우리 관계가 조금은 더 따뜻하게 진솔하게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좋아하는 일을 해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몇 가지 바뀌지 않는 진리는 있다고 본다.

좋아하는 일을 해라.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펴고, 나누는 삶을 살아라.

그러나 이 진리 속에 사람들이 고민하고 선택하는 길은 60억 전 세계의 인구수 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할 때 우리가 부딪히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는 돈벌이가 되냐의 문제이다. 단순히 어릴적 취미 생활로 한 두 번 하는 활동이 아니라, 독립적인 성인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수준에서 ‘일’을 정의할 때, 단순히 유희적인 활동으로 모든 삶을 채우는 것은 ‘무책임한’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이, 나는 즐거운 삶을 살고 있어! 너도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 처럼 살아! 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멍청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책임감있는 성인이라면 경제적인 독립을 염두해두고 자신의 좋아하는 일을 하는게 맞다고 본다. 그래서 어렸을때 다양한 경험을 하는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그 다음 부딪히는 문제는 어느 수준으로까지 만족하며 삶을 균형있게 살아가는 문제일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욕망에도 수준과 단계가 있으며, 하나의 욕망을 채우는 순간 또 다른 결핍이 채워진 욕망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살아가면서 우린 ‘기준’을 세울 필요성이 있다. 누군가는 돈을 위해 모든 취미와 인간관계를 뒤로 한 채, 평생을 회사에서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 학위를 따고, 자신의 내적 취향과는 무관하게 남들의 시선에 비춰 좋아보이는 일을 하려고 발버둥친다. 본인이 그런 삶을 선택함에 있어서 행복하다면 그 또한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단 한번도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함’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느껴본 적 이 없다. 좋아하는 일을 어느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선택하느냐는 본인의 삶을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이 문제에서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본인에게 적합한 삶을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아하는 일을 진지한 마음 가짐으로 꾸준히 내공을 쌓아올려 전문성과 대체불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돈과 명예는 따라온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대부분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하루라도 빨리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 자신의 전문성을 세밀하게 조각하며 삶을 이뤄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하는 일이 놀이가 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이 얼마나 축복인가.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보통의 적은 ‘주위의 시선’이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좌절된 우리의 꿈, 주변 친구로 부터 좌절된 희망은 사실 누구를 탓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진정한 적은 ‘우리 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한 마디 말로 평생의 관계가 틀어지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니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도 이런 갈대가 없다. 지금 당장의 결정이 평생 지속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선택을 주저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다만 지금 내렸던 선택이 현재의 개인적 확신을 갖고 내린 선택이라면, 그걸로 족하다. 개인이 겪는 상황은 매번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의 조언은 ‘참고’가 될 뿐, 그대로 적용 될 수없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지금 겪고 있는 일을 현재에 초점을 맞춰 행동하면 그만이다. 그 이후의 일은 그때가서 또 현명하게 결정을 내리면 된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 그 경험 속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진지하게 고민 해볼 것. 어떤 활동 속에 즐거움을 느꼈고, 누구와 교감했을때 나다운 모습을 보였는지 생각해 볼 것.

20년 남짓 살아가며 노출됐던 환경이 평생 하게 될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는걸 깨닫게 된다. 물론 간혹, 전혀 다른 분야에서 종사했던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적성을 찾게되어 대성하는 경우를 볼 수는 있지만,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다.

그래서 내 주변에 누가 있어왔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는 능력적인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접하는 환경에 따라 사람들의 능력적인 격차는 커지고 세분화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난 ‘운명’이 있다고 본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환경과 나를 이루고 있는 가치관이 오직 내가 선택하고 고민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이라도 자신에게 적합한 삶을 고민하고, 그런 환경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는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운명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을까?

전생은 존재하는 것일까?

사람이 죽고나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오래 전 부터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의 되고 연구되어왔던 ‘영혼’이라는 존재는 100년 전

의사 던컴 맥두걸에 의해 사람이 죽게되면 평균적으로 체중이 21g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며 다시금 핫한 이슈가 된다.

그 영혼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빠져나가고,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절대로 알지 못한다.

때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기 때문에 우린 평생을 고뇌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며 겪게되는 무수한 일들과 인생 말로까지. 무엇 하나 정해진 것이 없이 우린 끊임없이 지속되는 연속선상의 시계열 속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며, 나누며 살아가는 것.

그 이외에는 모두 각 자의 생각에 맡겨두는 편이 편할 것이다.

사람은 개별적인 역할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게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무엇하나 의미없이 사용되는 것이 없다. 찬찬히 살펴보면 아무리 쓸모 없는 벌레라도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되는 먹이사슬의 한 층계에 위치하며, 자연을 이뤄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린 무엇을 해야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도통 모른다. 그것을 신중하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거나와, 주위에 이런 생각을 내뱉는 순간 ‘세월 좋은 놈’이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분명히 사람마다 역할이 존재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역할에 대해서 자신만의 적합한 방법이 몸 속에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누군가는 내적 물음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 존재한다. 방법은 천차만별이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우리 모두 각 자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알아갈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린 내몸사용설명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우리 몸 속을 이루는 수 억개의 세포들은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위해 활동하며 쉼없이 움직일 뿐이다.

알고 싶다. 내 몸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하지만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벗어나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그저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게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다만, 크고 작은 외부의 일들에 대해 내 몸 속에서 일어나는 파동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려한다.어떤 감정을 느끼고 살아가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하나씩 알아가고 싶다.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싶다. 길을 걸어가며 내 몸이 반응하는 무수히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온전히 간직하고 싶다.

사람사이의 논쟁

나는 문제가 생기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주변 사람들에게 가볍게 물어보곤 한다.이런 일이 있는데 ‘너 같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라며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얻게 되는 2가지 장점이있다.

첫째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린 두려움, 아픔이라는 추상적인 말에 의해 행동에 제동을 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 실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생각만큼 그리 무섭지도,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느낄때가 있다. 알지 못하기에 무섭고, 막연했기 때문에 두려웠던 일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함으로써 스스로 문제에 대해 구체화를 시키는 과정을 통해, 문제의 본질적인 문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경험 많은 사람들 혹은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을때, 그들의 관점이나 조언을 내가 ‘참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출발점이 다르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삶을 하루 하루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다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 자신만의 선택을 하며 인생을 꾸려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되는 이야기들은 나의 선택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잘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하며,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이 그 상황에 자신의 상황을 대입하여 나름의 행동 방향을 ‘조언’해주는 것이다.

누군가는 전자의 과정을 답답하게 느껴 누가 도움을 요청하거나 고민 상담을 해왔을때, 마치 진리인냥 자신만의 답을 내놓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혹은 대단히 머리가 비상해서 자신만의 해답을 갖고 그 이외의 답답한 주변 사람들을 보면 고쳐주지 못해 안달인 사람도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고민 많은 인간에게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100%에 가까운 해답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이 겪었던 문제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했던 이야기를 전달해줌으로써, 고민을 겪는 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 뿐인 것이다.

수저

일단 방에 들어온 뒤에는나가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서희는 일어설 수 없다. 숨소리를 죽이며, 그래서 가냘픈 가슴이 더 뛰고 양 어깨로 숨을 쉴 수밖에 없었는데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어린것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가.  _박경리 토지


온라인 상에서 ‘수저’논란이 뜨겁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등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자식들의 삶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현 상황을 반영한 신조어다. 3포 세대, 5포 세대 등 점차 살기 위해 그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젊은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연애도 여행도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이다. 좋지 못한 배경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에게  금수저 자식들은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35년의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쳐 폐허로 남겨진 대한민국이 현재의 눈부신 성과를 이룬 것은 ‘기적’이라 불릴 만 하다. 장준하 교수는 60~80년대 대한민국의 성장과 전 세계의 성장 흐름을 봤을 때, 강한 리더십을 가지고 대기업 중심의 수출지향 성장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진단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책은 성장을 위한 ‘좋은’ 정책 이었지만 박정희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 할 순 없으며, 그 과정에서 무시된 민주주의와 친일파 청산과 미제로 남겨진 과거사는 현재까지도 아픈 가시로 남아있다.

젊은 사람들이 BMW를 타고 다니면, ‘친일 자식 후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고, 그걸 바라보는 다양한 수저들의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외국에 오래 살다온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오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얘기한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 같진 않다. 바늘구멍보다 좁은 좋은 직장은 갖기 어렵고, 불안정한 비정규직 생활 속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자동차를 구매하며 자식노릇, 부모노릇을 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고 사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누군가는 노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문제는 오직 개인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구조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깊숙히 자리한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가 아픈 문제일 것이다.

지금의 현상은 우리가 겪어야 하는 아픔 중 하나이다. 폐허 속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우리나라를 일으킨 60~90년대의 부모세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과 생각을 갖고 하루하루를 지내온 것이다. 삶의 질을 고민하기 이전에 오늘 저녁에 먹을 밥이 없는 비참한 생활 속에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다보니 자식만큼은 좋은 대학에 번듯한 직장에 다녀 자기가 누려보지 못했던 것을 마음껏 누리길 바라는 마음과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자식이 열심히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만나 부모는 자식에게 ‘강요’와 ‘부담’을 메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대는 확실히 변하고 있다. 아무리 헬조선, 동수저라고 하지만 당장 간단히 약을 먹어 치료할 수 있는 병에 걸려 죽거나, 밥을 먹지 못해 굶어주는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찾기 어려워졌다. 우리는 ‘삶의 질’을 고민하는 세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과거의 잔재가 남아 있어 자신만의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틀렸다고 하는 시선에 종종 부딪히고있다. 혹은 그 방향을 결정하기 이전에 과거에 해왔던 방식대로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다수의 사람들이있다.

피겨여왕 김연아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한 연기와 빛나는 전세계 랭킹을 자신의 삶과 돌이켜보면 한 없이 작아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단지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를 남들보다 일찍 찾아서 피나는 노력을 한 사람일 뿐이다. 대신 유혹을 뿌리치고 엄청난 진념을 가지고 끝없이 노력한 그녀의 모습에는 박수를 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도 할 수 있다. 수저논란은 과거의 피해의식에서 피어난 문제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경제적 지표를 통해 삶을 제단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고민해야하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고민해서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한다.